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1차 침공 == 1216년 8월, [[아아(후요)|아아]](鵝兒)와 [[야율걸노]](耶律乞奴)가 통솔하는 거란 유민들이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 가운데에 위치한 '대부영'이라는 섬에 포진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북계]][[병마사]] 독고정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너희가 군량을 보내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우리가 반드시 너희의 강토를 침범할 것이다. 내가 훗날에 황색 기를 세우거든 네가 와서 [[황제]]의 조칙을 들으라. 만약 오지 않으면 너를 칠 것이다.” 그러나 독고정은 거란 진영에서 황기가 세워진 걸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양식을 보내라는 요구도 전부 묵살해버렸다. 이에 거란 군민 9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의주]], [[삭주]], [[창성]], [[운산]], [[영변]] 등 여러 고을을 침략하면서 고려 백성들을 살육하고 소와 말, 돼지를 마구 끌어다 잡아먹었다. 고려군은 이러한 거란 유민들의 침략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고려 최씨 [[무신정권]]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충헌]]의 탓이 컸다. 변방에서 거란군이 압록강 건너편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최충헌은 "어찌하여 이러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역기를 번거롭게 하고, 국가를 놀라게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며 '''변방에서 애써 달려와 보고한 사람을 유배보내 버렸고 변방 장수들은 처벌받기 싫어서 "적군이 두세 성을 함락시킨 뒤에 보고하자."며 일부러 늦게 보고를 올렸다.''' 삭주지방에 살던 양수척이 거란 유민들의 길잡이 노릇을 한 것도 피해를 커지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의민]] 집권 시절, 이의민의 아들이었던 [[이지영(고려)|이지영]]이 삭주 장군으로서 떵떵거렸는데, 이지영은 양수척 출신 [[기생]]인 [[자운선]]을 총애하고 양수척들에게 가혹한 징세를 가했다. 그러다가 이의민이 주살당하고 이지영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면서, 양수척은 "이제야 한숨 돌리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최충헌은 자운선을 취한 뒤 이지영보다 더 많은 공물을 거둬들였다. 이에 양수척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근근히 지내다가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귀순해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익명서를 개경에 보내 "기생의 무리를 죽이면 나라를 돕겠다"는 뜻을 알렸다. 이에 최충헌은 자운선, 상림홍을 고향에 돌려보내 양수척들의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여러 고을을 제압하고 약탈을 자행한 거란군은 8월 24일 고려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 대요는 건국한지 2백여 년만에 여진의 침범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그 후 거의 백년이 지나서 이제 여진에 빼앗겼던 모든 고을을 회복했다. 그러나 파속로의 일개 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여러 번 쳐서 이제 막 항복을 받았다. 이 지역의 관리들은 종전대로 등용하고 백성들도 여전히 자기 일에 안착하고 있다. 고려도 빨리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곧 대군을 보내 사정없이 살육할 것이다." 물론 이는 허세였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고려는 뒤늦게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상장군 노원순을 중군 병마사,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 병마사,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 병마사로 삼은 [[삼군]] 1만 5천명이 8월 22일 [[개경]]에서 출정했다. 이때 고려의 [[국왕]] [[고종(고려)|고종]]은 병사들을 독려하고 노원순에게 부월을 하사했다. 이후 삼군은 북진하여 9월에 [[청천강]] 남변의 조양진에 도착했다. 노원순은 삼군에서 100명의 별초군과 신기군 40명씩 차출해 총 54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강을 건너 거란군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 특공대는 처음엔 수적으로 밀려서 고전했지만 후군 낭장 정순우의 맹활약에 힘입어 적병 82명의 목을 베고 포로 10명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삼군은 [[연주]] 동쪽에서 적 1백명의 목을 베었고, 서북 열읍의 김공석, 현장 등도 각기 수백 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으며, 서경의 병력도 조양에서 1백 6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어 삼군은 귀주까지 진격, 200여 명을 참수하고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신리에서 190명, 조종수에서 76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거란군은 각지에 흩어졌던 동족들을 모아 개평에서 고려군과 회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고 삼군은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가 대단해서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때 후군병마사 김취려가 칼을 뽑아들고 말을 채찍질해 기존정과 함께 적군의 진영을 후려치자 거란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거란군이 개평역 북쪽에 군사를 매복했다가 중군을 습격해 상장군 노원순을 비롯한 중군이 위험해졌는데, 김취려가 되돌아서 구원해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원순은 적이 만만치 않다고 여기고 밤중에 김취려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며, 우군도 이르지 않았소. 당초에 3일 먹을 양식만 준비하였는데 지금 벌써 다 떨어졌으니, 물러가서 연주성(延州城)에 웅거하여 후일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요.” 그러자 김취려가 말했다. >"우리 군사가 여러 번 이겼으므로 투지가 아직 왕성하니, 그 예봉을 이용하여 한 번 싸운 뒤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얼마 후 거란군과 고려군이 묵장(墨匠) 들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고려군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다만 이 와중에 김취려의 맏아들이 전사했다. 거란군은 [[묘향산]]으로 후퇴해 보현사를 불태웠고 삼군은 이를 추격해 2400여 명의 목을 베고 남강에서 거란군 천여 명을 빠뜨려 죽였다. 남은 거란 무리는 밤중에 창주로 도망가면서 여자와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고 가니, [[전미가 울었다|목놓아 우는 소리가 "소 만 마리의 울음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이때 어떤 거란인이 스스로를 '관가의 사람'이라고 칭하며 김취려에게 가서 요청했다. >"우리들은 귀국의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마는, 부녀와 아이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청하건대, 모두 죽이지 마시고 또 우리에게 육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곧 날짜를 정해 스스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를 믿지 않고 추격을 계속했고 거란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깃발, 소와 말 등을 확보했다.(다만 거란군이 소와 말의 허리를 찍거나 엉덩이를 찔렀기 때문에 다시 쓸 수 없었다.) 이후 고려군은 연주로 철군해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거란 유민들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제와서 고려를 떠나 도로 돌아간다면 몽골군에게 어육이 될 게 뻔했으니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고려를 공략해 살길을 열어야 했다. 이에 거란 유민들은 추가 침공을 감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